제1장. 풍운의 시작 (風雲의 始作)
낙양(洛陽)의 밤은 깊었으나, 하늘은 노한 듯 거친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먹빛 구름 사이로 간간이 번개가 내리꽂힐 때마다, 성벽 너머 저잣거리의 윤곽이 한 순간 드러났다가 어둠 속에 삼켜졌다. 빗방울이 기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밤을 울렸다.
성문 외곽에 자리 잡은 낡은 주루, '취풍루(醉風樓)'. 삐걱거리는 문틈 사이로 습한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기름이 부족한 탓인지 심지는 연신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점소이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손님들은 침묵 속에 술잔만을 비우고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빗소리는 더욱 거세져,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구슬발처럼 주루를 에워쌌다.
그때, 주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낡아 빠진 청색 도포는 빗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고, 등 뒤에는 천으로 칭칭 감은 녹슨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젖은 삿갓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나무 바닥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으나,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빈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의 가슴팍 안쪽에는 돌아가신 스승, 일엽(一葉)이 남긴 낡은 쇳조각 증표가 차갑게 닿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는 늘 그것을 부적처럼 품고 다녔다. 스승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기라도 한 듯, 차가운 쇠의 감촉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점소이, 독주 한 병과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내오게."
낮게 깔리는 목소리. 졸고 있던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사내는 삿갓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드러난 얼굴은 평범했으나,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만은 차가운 얼음처럼 빛나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온 듯 거칠어진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눈빛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바로 청성파(靑城派)의 파문 제자, 청운(靑雲)이었다.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독주를 한 모금 머금자, 차가웠던 속이 겨우 풀리기 시작했다. 허나 몸이 따뜻해질수록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공허함은 더욱 선명해졌다. 스승을 잃고 문파에서 쫓겨난 지 어언 삼 년. 강호를 떠돌며 닳아버린 것은 신발만이 아니었다. 한때 청성의 수제자(首弟子)로 불리던 자의 손에 남은 것이라곤, 녹슨 검 한 자루와 풀리지 않는 의문뿐이었다.
그때였다. 주루의 반대편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건장한 사내 셋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의 소매 안쪽에는 붉은 실로 수놓아진 기이한 문양이 숨겨져 있었다. 무림에 암운을 몰고 온다는 조직, 혈영회(血影會)의 말단 무인들이었다.
"어이, 거기 청색 도포. 차림새가 말이 아니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
사내 중 한 명이 청운의 탁자를 발로 걷어차며 시비를 걸어왔다. 탁자 위의 술잔이 넘어지며 독주가 바닥에 쏟아졌으나, 청운은 나머지 술잔을 태연히 입가로 가져가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무심한 태도에 화가 치민 사내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이놈이 귀가 먹었나!"
단도가 청운의 어깨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 순간, 청운의 신형이 미세하게 흐릿해졌다.
챙!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단도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청운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젓가락 한 짝으로 단도의 척(脊)을 정확히 찔렀을 뿐이었다. 손목을 비틀어 내력을 실은 정교한 한 수. 사내의 호구(虎口)가 찢어지며 단도가 주인의 손을 떠났다.
"내공을 병기에 싣기도 버거운 이류(二流) 수준인가. 혈영회의 말단치고는 실망스럽군."
청운의 목소리는 비바람 소리보다 차가웠다. 사내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자신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챈 이 사내가 결코 평범한 무인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소매 안의 혈영회 표식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건만.
"네, 네놈은 누구냐!"
"길 잃은 낙엽 같은 자지."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동심원의 파문을 그렸다. 청산심법(靑山心法)의 정화(精華)가 그의 전신을 타고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일류(一流)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기(內氣)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겁에 질린 혈영회의 무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빗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허겁지겁 자리를 뜨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두루마리 문서가 떨어져 있었다. 청운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기름먹인 양피에 적힌 글씨는 빗물에도 번지지 않았으며, 그 안에는 북해로 향하는 비밀 경로와 만마단(萬魔丹)에 관련된 은밀한 지령이 적혀 있었다.
"혈영회의 목표가... 북해빙궁(北海氷宮)이라는 건가."
청운은 문서를 품 안에 넣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의 증표가 가슴 위에서 차갑게 울리는 듯했다. 마치 이 문서를 놓치지 말라고 재촉하기라도 하듯이.
주루 밖으로 나서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먹빛 하늘 아래 북쪽을 바라보는 청운의 눈동자에 번개 빛이 서렸다. 천하를 뒤흔들 풍운(風雲)의 조짐이, 이 비바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