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와중지중심 (渦中之中心)
밤새 대지를 적시던 비가 그치자, 낙양(洛陽)의 아침은 눈부신 햇살과 함께 활기를 되찾았다. 젖은 흙에서 피어오르는 토향(土香)과 시장통의 왁자한 소음이 어우러져 천하 제일의 도시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빗물이 고인 돌길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물보라가 일었고, 노점의 상인들은 젖은 차양을 걷어 올리며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운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성문을 통과했다. 그의 시선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행인들이나 즐비한 상점들이 아닌,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눈'들을 향해 있었다. 무림맹(武林盟)의 본거지답게 곳곳에서 각 문파의 제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정체 모를 기운들이 흐르고 있었다. 어젯밤 주루에서의 소란이 이미 소문이 되었는지, 혹은 혈영회의 첩자가 이미 움직이고 있는지, 자신을 향한 시선이 평소보다 한두 겹은 더 두꺼운 듯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낙양에서 가장 이름난 기루이자 정보의 집결지인 '만화루(萬花樓)' 앞이었다. 삼층 누각의 처마 끝에 걸린 비단 등롱이 아침 바람에 나부끼고, 화려한 편액의 금박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셨다.
"어머, 어서 오세요. 귀한 손님이 오셨네."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이 손짓했지만, 청운은 묵묵히 이층의 가장 은밀한 방으로 향했다. 좁은 복도를 지나 이중으로 된 장지문을 열자, 차향(茶香)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의 김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하나 눈빛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천기각(天機閣) 낙양 분타주(分舵主)였다.
"천기각의 분타주를 뵙소."
청운이 자리에 앉으며 어젯밤 혈영회 무인들로부터 얻은 두루마리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문서에 적힌 '북해(北海)'라는 글자와 만마단에 관한 암호를 보자 눈썹을 찌푸렸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청성파의 잃어버린 용(龍)이 낙양에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었네만, 들고 온 물건이 예사롭지 않군."
노인은 양피 위의 암호를 손톱으로 짚어가며 한 자 한 자 해독했다. 이윽고 나지막이 탄식했다. 한 박자가 늦은,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정돈하는 사람의 탄식이었다.
"이것은 혈영회의 북해 진출 계획서일세. 혈영회가 단순한 자객 집단이 아니라, 중원 밖의 세력과 깊숙이 연계되어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지. 자네, 정말 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생각인가?"
노인의 물음에는 걱정과 경고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청운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이미 발을 들였소. 스승님의 원한을 갚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소."
청운의 목소리에 서늘한 검기(劍氣)가 실렸다. 파문 제자라는 오명 뒤에 숨겨진 깊은 한(恨)이, 찻잔 위의 수면을 미세하게 떨리게 했다. 노인은 그 떨림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류(一流)의 경지에서 이 정도의 기세를 자연스레 풍기는 자는 흔치 않았으니,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방 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한 소녀가 차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일말의 소리조차 없었다. 다과를 내려놓는 손놀림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무공의 소양이 상당함을 짐작케 했다.
"할아버지, 손님이 또 오셨어요. 이번엔 아주 '붉은' 손님이요."
소녀의 말에 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청운 역시 반사적으로 등 뒤의 검병을 움켜쥐었다. 주루 아래편에서부터 피비린내 섞인 강력한 기운이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살기(殺氣)가 층층이 쌓여 올라오는 듯, 이층 마루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적영(赤影)... 혈영회의 십대 호법(十大 護法) 중 한 명일세. 청운 소협, 여기는 우리가 막을 테니 뒷문으로 피하게!"
노인의 외침에도 청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삿갓을 벗어 던졌다. 가슴 안쪽의 쇳조각 증표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차갑게 울렸다.
"피한다고 끝날 인연이 아니오. 오히려 잘되었군. 놈들의 수장에게 가는 길을 물어봐야겠소."
청운의 전신에서 청산심법(靑山心法)의 푸른 내기(內氣)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화루의 화려한 장식들이 강기에 눌려 미세하게 흔들렸다. 삼 년간 강호를 떠돌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단련된 청산심법은, 청성파의 후원 없이도 독자적인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일류의 정점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려 발버둥 치는, 아직은 절정(絶頂)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 문턱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한 자의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