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자비로운 섬멸 (Merciless Extermination)
"제발... 누구 없소...? 아으으..."
숲의 습한 흙바닥 위로 선명한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용병 한스는 부서진 방패를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팍은 고블린의 녹슨 칼날에 깊게 패여, 붉은 선혈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그의 갑옷 위에서 핏빛으로 반사되었다. 그를 에워싼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승리를 확신한 듯 침을 흘렸다.
이안은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실전은 아카데미의 시험장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고블린들의 탁한 숨소리가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듯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외면할 만큼 비겁하지는 못했다.
"9서클 치유 마법, '성자의 숨결(Saint's Breath)'!"
이안이 절박하게 영창을 내뱉었다. 죽어가는 자도 단숨에 일으켜 세운다는 전설 속의 기적이 그의 손끝에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눈부신 백색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한스의 상처로 날아갔다. 그러나...
피쉭-
한스의 가슴에 닿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무더운 여름날의 가습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안개 한 줄기였다. 시원한 감촉에 한스가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깊게 파인 상처는 아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안의 손이 허공에서 무력하게 떨렸다. 또, 1%다.
"끼익? 끽끽!"
고블린들이 어이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며 포복절도했다. 절망적인 상황. 고블린 한 마리가 한스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으려던 그 찰나였다.
쿠우웅-!
폭풍이 휘몰아치듯 숲의 고목들이 좌우로 쩍쩍 갈라지며 쓰러졌다. 대지가 울리는 진동 속에서 나뭇잎과 흙먼지가 폭풍처럼 치솟았고, 그 자욱한 먼지 구름 속에서 눈부신 백색 장포를 휘날리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성스러운 후광이 비치고 있었으나, 오른손에 들린 거대한 은색 십자 대검 '자비'는 그 어떤 악마의 무기보다 흉폭해 보였다.
"추악한 존재들이 가여운 어린 양을 괴롭히고 있군요.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이분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비이지요."
여인, 에스텔이 하늘을 향해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홀리 라이트(Holy Light)!"
이안은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다. 보통 1서클의 홀리 라이트는 적의 시야를 잠시 가리는 눈부심에 불과하다. 하지만 에스텔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것은 태양의 파편이었다.
쿠아아아앙-!
숲 전체가 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고블린들의 비명은 빛의 속도보다 느렸다. 빛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타버린 흙과 재만이 남았을 뿐, 수십 마리의 고블린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다행히 에스텔의 정밀한(?) 조절 덕분에 한스와 이안만은 무사했지만, 그들이 누워있던 지면은 유리가 녹아붙은 것처럼 매끄럽게 변해 있었다.
"사제님! 정말... 대단한 구원이었습니다! 이제 빨리 이분의 상처를...!"
이안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하자, 에스텔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저는 치유력이나 축복 같은 정상적인 신성력이 단 1%도 발현되지 않는 사제거든요! 오직 파괴와 방어만이 제게 허락된 유일한 기적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이제 공격하는 적이 없으니 이분은 더 이상 상처 입을 일이 없지 않나요?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예방 의학이며 근원적인 치유입니다! 물리적 자비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아니, 상처가 깊어서 이대로 두면 출혈로 돌아가신다니까요!"
에스텔은 당황한 듯 자신의 십자 대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제가 더 세게 때려서 고통을 못 느끼게 해드릴까요?" 이안은 전력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안이 나섰다. 위력이 먼지 같다면, 압도적인 지식과 통제력으로 틈새를 메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1%의 마력을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수천 가닥의 '마나 실'로 뽑아냈다. 9서클의 기하학적 이해도를 바탕으로, 끊어진 혈관과 찢어진 근육, 손상된 신경을 분자 단위로 완벽하게 꿰매고 이어 붙이는 초정밀 외과 수술을 마법으로 집도하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생명선이 꼬이는 고도의 집중.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창백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에스텔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은 산을 무너뜨릴 힘을 가졌지만, 그 힘으로는 남의 상처를 꿰맬 수 없었다. 손을 대는 순간 환자가 터져버릴 테니까. 거대한 신성력을 들이부어 살을 억지로 재생시키는 교단의 기적과도 달랐다. 생명의 결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이어 붙이는, 한없이 초라하지만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구원의 형태였다.
마침내 한스의 지혈이 끝나고, 이안이 탈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스텔이 다가와 그녀의 거대한 그림자로 이안을 덮었다.
"놀랍군요. 마법사님." "하아... 1%짜리 마법이라고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아니요. 제가 아는 교단의 그 어떤 거룩한 사제들보다, 당신의 그 땀방울 맺힌 섬세한 손짓이 훨씬 '진짜' 같군요. 파괴밖에 모르는 교단의 무기로 사는 것은 이젠 지긋지긋하던 참이었습니다."
에스텔이 십자 대검를 어깨에 척 걸치며 빙긋 웃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저는 에스텔. 당신의 그 미련하고도 진짜인 여정을 제가 곁에서 지켜보도록 하죠. 물론, 앞길을 막는 불경한 것들은 제 '물리적 자비'로 구원해 드리겠습니다."
교단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으나 파괴의 저주에 환멸을 느낀 사제, 그리고 지식은 신급이지만 출력은 쥐꼬리만 한 마법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비효율적인 '치유' 파티가, 그렇게 분명한 호기심과 동기를 품고 결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