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NOVEL

제3장. 칩 속의 좌표

착지.

강철 문을 넘은 레드라인이 폐기물 더미 위로 곤두박질치듯 내려꽂혔다. 서스펜션이 비명을 질렀고, 타이어가 녹슨 금속판 위를 미끄러지며 시뻘건 불꽃을 쏟아냈다.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졌다. 김과속은 이를 악물고 핸들을 비틀어 겨우 자세를 잡았다. 바이크가 멈춘 자리엔 길게 패인 타이어 자국만이 남았다.

엔진 온도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박이고 있었다. 부스터를 연속으로 밟은 대가다. 냉각 밸브의 수명이 15%도 남지 않았다. 배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허벅지를 데우고, 폐유와 녹슨 쇳물 냄새가 헬멧 필터를 뚫고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지금은 바이크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잔여 시간: 1분 47초]

부츠가 금속 잔해를 밟으며 삐걱거렸다. HUD에 표시된 좌표를 따라가자, 폐기물 처리장 한가운데 방치된 구형 데이터 금고가 눈에 들어왔다. 기업 연합이 쓰던 군용 등급 금고. 표면이 산화되어 시뻘겋게 변색돼 있었지만, 잠금 장치의 홀로그램 인디케이터만은 여전히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김과속은 바이크에서 뛰어내리며 허리춤의 물리 해체 툴을 뽑아 들었다. 군용 ICE(방벽)를 소프트웨어로 뚫는 건 배달부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잠금장치의 물리적 힌지 부분을 고열 토치로 지져 강제로 뜯어내는 건 뒷골목의 방식이었다. 3초. 금고의 전자 잠금이 파괴되며 뚜껑이 증기를 뿜으며 열렸다. 화학 약품 냄새가 섞인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훑었다.

안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검은 칩 하나. 1천만 크레딧의 무게치고는 놀랄 만큼 초라했다. 메가-드라이브 코어 칩이 완충재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게 1천만 크레딧짜리라고? 내용물은 묻지도 보지도 않는 게 원칙이지만..."

김과속이 코트 주머니에 넣기 위해 칩을 맨손으로 집어 든 순간이었다. 칩 표면에 각인된 미세한 회로가 그의 강화 장갑 피복을 뚫고 HUD 시스템과 강제로 동기화(Sync)를 시도했다.

[경고: 최상위 보안 프로토콜 강제 활성화.] [비인가 접속자 확인. 보안 ICE 가동 대기 중...]

김과속의 헬멧 스캐너가 타는 듯한 마찰음을 내며 경고를 쏟아냈다. 그가 황급히 칩을 던지려던 찰나, 강제 동기화의 여파로 칩에 걸려 있던 락(Lock)이 일시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며 홀로그램 파편 하나를 허공에 투사했다.

그것은 황금색 날개 모양의 로고였다.

[에어-웨이 접속 포인트 #07. 좌표: N37.5206° / E127.0731°. 임시 인증 완료.]

에어-웨이. 네오-서울 상공 500미터에 부설된 초고속 공중 도로. 상위 0.1%의 기업 임원과 정부 고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절대 영역이다. 속도 제한도, 검문도, 폐기물 냄새도 없는 하늘길. 기업의 최고 기밀 칩이 품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그 하늘길의 접속 좌표와 일회성 인증 키였다.

김과속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에어-웨이에 올라가면 하층 구역 따위는 순식간에 벗어날 수 있다. 속도의 한계 자체가 바뀐다. 이건 단순한 데이터 칩이 아니라, 하늘로 통하는 열쇠였다.

배달부의 철칙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증발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탐욕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더 빠른 길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레이서의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티켓을 주웠는데 안 쓸 수는 없지."

그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김과속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을 때, 그의 목 바로 옆 공기를 가르며 단분자 와이어가 스쳐 지나갔다. 잘린 공기가 가느다란 파열음을 냈다. 1밀리만 늦었어도 경동맥이 잘렸다.

"반응 괜찮네. 소문대로야, 스피드-킹."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마른 체구에 형광 보라색 바이저를 쓴 여자였다. 손가락 사이에 감긴 단분자 와이어가 폐기물 처리장의 희미한 조명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등 뒤로 유선형 바이크 한 대가 엔진을 끈 채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소음 하나 없이 여기까지 접근했다는 뜻이다.

"바이퍼. 독사라고 불러도 돼."

김과속은 칩을 움켜쥔 채 한 발 물러섰다. 등줄기에 찬 땀이 흘렀다. 이 여자는 블랙-하운드가 아니다. 장비도, 움직임도, 살기의 질이 완전히 다르다. 프리랜서 사냥꾼. 그것도 최상급.

"그 칩, 에어-웨이 좌표가 들어 있다는 거 알고 있지? 1천만 크레딧 따위에 팔 물건이 아니야."

바이퍼가 와이어를 느슨하게 풀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연결해 줄게. 칩 값으로 5천만 크레딧. 그리고 에어-웨이에 올라갈 티켓까지."

달콤한 제안이었다. 너무 달콤해서 독이 묻어 있다는 게 확실했다. 이 세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 하물며 에어-웨이 티켓이라니.

그때, 폐기물 처리장 외벽 너머로 중장갑차의 엔진음이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블랙-하운드가 우회로를 찾아낸 것이다. 동시에 하늘에서 탐조등 세 개가 처리장 내부를 훑기 시작했다. 하얀 빛줄기가 폐기물 더미 사이를 칼날처럼 갈랐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시간 없어, 배달부. 나한테 올래, 아니면 저 개들한테 뜯길래?"

바이퍼의 바이저 너머로 형광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김과속은 과열된 레드라인의 엔진 커버를 손등으로 톡 쳤다. 뜨거웠다. HUD 구석에 빨간 경고 아이콘이 네 개나 떠 있었다. 부스터는 못 쓴다. 냉각 밸브는 한계다. 그리고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셋째 선택지가 있는데."

김과속은 레드라인에 올라타며 시동을 걸었다. 과열 경고를 무시한 엔진이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둘 다 따돌리고 튄다."

레드라인의 헤드라이트가 점멸하며 폐기물 처리장의 어둠을 갈랐다. 블랙-하운드의 장갑차가 외벽을 부수며 진입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바이퍼의 와이어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삼자 대치. 제한 시간 0초. 탈출로 없음.

―브레이크 없는 바이크에겐, 애초에 '멈춤'이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과속은 가속 그립을 끝까지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