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설경지살기 (雪境之殺氣)
중원의 온화한 기운은 간데없고,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북쪽의 변방 연주(延州).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질 만큼 짙은 눈보라가 시야를 삼키고 있었다.
청운 일행이 탄 말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눈길을 헤쳐 나갔다. 청운은 낡은 도포 위에 털 외투를 겹쳐 입었으나, 등 뒤에 맨 검 자루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금속음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남궁휘는 화려한 백색 장포 대신 두터운 가죽옷을 입었음에도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소설은 모피로 얼굴을 칭칭 감싼 채 품 안에서 꺼낸 북해 지형도를 꼼꼼히 살피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청운, 북해라는 곳은 원래 이렇게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거요? 아직 빙궁 근처도 가지 않았는데 뼛속까지 시리는군."
남궁휘가 이를 덜덜 떨며 불평했다. 남궁세가의 온기 가득한 검무장에서 날마다 수련하던 그에게 이 혹한은 무공보다 견디기 어려운 적이었다.
"빙궁은 이곳보다 열 배는 더 춥다고 들었소. 남궁세가의 따뜻한 온실이 그리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오."
청운의 무심한 대꾸에 남궁휘가 투덜거리려던 찰나, 지도를 보던 소설이 말의 고삐를 세차게 당기며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잠깐만요! 지도에 의하면 이 근처는 사방의 바람이 한곳으로 모이는 협곡이에요. 그런데 바람 소리 사이에... 말발굽 소리가 섞여 있어요. 아주 묵직한 철갑(鐵甲)의 소리예요!"
소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방의 눈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騎)의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철갑으로 전신을 두르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이들. 깃발에는 핏빛으로 '혈(血)' 자가 새겨져 있었다. 혈영회의 정예 기마 부대, 철기대(鐵騎隊)였다.
"운벽 장로의 전서구가 제때 도착한 모양이군. 이 눈밭을 우리의 묘지로 삼을 생각인가."
청운이 등 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신(劍身)이 눈보라 속에서 푸른 빛을 뿜었다. 철기대의 대장이 장창(長槍)을 치켜들며 포효했다.
"낙엽을 밟아 으스러뜨려라! 주군께서 청운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만마단(萬魔丹)의 정수를 약속하셨다!"
대장의 명에 따라 철기대가 거대한 검은 파도처럼 눈밭을 가르며 돌진해왔다. 남궁휘 역시 창궁검(蒼穹劍)을 뽑아 은빛 강기(罡氣)를 내뿜었다. 눈보라와 검기(劍氣)가 뒤섞이며, 연주의 고요하던 설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청운의 낙엽검법(落葉劍法)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철갑을 두른 기병들이 말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놈들은 만마단의 기운을 받았는지, 팔이 잘리고 가슴에 검상(劍傷)을 입고도 고통을 모른 채 달려들었다.
"끝이 없군! 이놈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어!"
남궁휘의 외침대로 철기대의 기세는 정상적인 무인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하나를 베면 둘이 달려들고, 검기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귀물(鬼物)에 가까웠다. 세 사람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때였다.
빙화(氷花) — 만천화우(滿天花雨)!
하늘에서 수천 개의 얼음 송곳이 꽃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철기대의 철갑을 종잇장처럼 꿰뚫고 지나가는 서늘한 냉기(冷氣). 돌진하던 기마들이 얼음 화살에 관통당해 말 위에서 줄줄이 나뒹굴었고, 그 사이로 한 여인이 하얀 소복을 휘날리며 설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투명한 얼음으로 주조한 듯한 세검(細劍)이 들려 있었다. 검신에 서린 냉기가 주변의 공기를 결정(結晶)으로 만들며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중원의 무인들이 북해의 문턱에서 피를 뿌리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돌아가라, 어둠의 무리들이여."
서늘한 미모와 함께 내뿜는 압도적인 냉기. 그녀는 북해빙궁의 정찰대를 이끄는 소궁주 설희(雪姬)였다. 그녀가 한 발 내딛자 발아래의 눈이 순식간에 빙판으로 변했고, 그 냉기가 파문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철기대장은 설희의 등장을 확인하자마자 퇴각 명령을 내렸다. 북해의 안주인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자살 행위임을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보라를 틈타 놈들이 물러가고, 설원에는 검붉은 핏자국과 얼어붙은 시체들만이 남았다.
설희는 차가운 시선으로 청운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구원의 온기 따위는 없었다. 오직 외부인에 대한 냉정한 심문만이 서려 있었다.
"무림맹에서 보낸 특사들인가? 그리고 북해의 지도를 든 자도 있군. 따라오라. 빙궁주(氷宮主)께서 그대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청운은 설희가 남긴 서늘한 잔상(殘像)을 바라보며 검을 거두었다. 검신에 맺힌 핏빛 눈이 천천히 녹아 사라졌다. 북해의 소용돌이가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