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NOVEL

제15장. 빙백의 증명 (氷白之證明)

전각 안의 공기는 이제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설무극의 안광(眼光)이 청운의 전신을 꿰뚫는 듯했다. 옥좌 주변의 얼음 결정들이 더 이상 녹아 사라지지 않고, 날카롭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빙궁주의 분노가 형상화된 것이었다.

"그 증표는 본궁의 장로급 이상만이 지닐 수 있는 비전(秘傳)의 물건. 외부인의 손에 있을 리가 없다. 설사 네놈이 혈영회의 첩자가 아닐지라도, 그 갈취의 죄는 피할 수 없으리라."

설무극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희가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세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검신(劍身)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바닥을 따라 서리를 만들며 청운의 발끝까지 기어왔다. 남궁휘 역시 반사적으로 검병을 쥐었으나, 청운이 왼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 손짓은 고요했지만 단호했다.

청운은 품 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증표가 아니었다. 녹이 슨 낡은 검 한 자루였다. 그가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자, 녹슨 금속이 얼음 탁자에 닿는 작은 소리가 적막한 전각을 가로질렀다.

"이 검을 알아보시겠소?"

설무극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산처럼 부동하던 빙궁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그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청운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전각의 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녹슨 검집에는 작게 '청산(靑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세월에 닳아 흐릿해졌으나, 필획 하나하나에 깃든 기운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것은... 청성파의 고(故) 일엽(一葉) 도장의 검이 아니냐?"

설무극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은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가에 미묘한 습기가 어렸다.

"나의 스승님이셨소."

청운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과 흔들림 없는 강단이 동시에 서렸다. 설무극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 들어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녹슨 검신 위를 오갈 때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이 풀리지 않은 실타래처럼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일엽... 그 고지식한 도사가 결국 제자에게 이 검을 물려주었군."

설무극은 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십여 년 전, 내가 중원을 유람하다 혈영회의 기습을 받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을 때가 있었지. 경맥이 역류하고, 내공이 단전을 찢으며 폭주하던 그 지옥 같은 순간에 한 도사가 나타났다. 자신의 내력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나의 주화입마를 진정시킨 이가 바로 네 스승, 일엽이었다."

전각 안의 살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따뜻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천천히 채워 나갔다. 설희는 놀란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고, 남궁휘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느라 숨조차 참고 있었다.

"그때 내가 감사의 표시로 건넨 것이 바로 그 빙궁의 증표였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할 때 북해를 찾으라 했거늘... 그는 끝내 직접 오지 않고 제자를 보냈구나."

설무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벗을 잃은 자의 그리움과, 미처 갚지 못한 은혜에 대한 회한이 깊이 배어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혈영회의 음모를 쫓다 그들의 손에 돌아가셨소. 마지막까지 정도(正道)를 걸으셨지만, 결국 어둠이 그분을 삼켰습니다. 나는 그 배후를 밝히고 스승의 뜻을 잇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것이오."

청운의 눈에 잠시 붉은 기가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설무극은 청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빙궁주의 손에서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모순적인 내기(內氣)가 전해져 왔다. 그것은 빙백신공이 아닌,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온기였다.

"일엽의 제자라면 내 제자와 다름없다. 이제야 알겠군. 왜 혈영회가 그토록 집요하게 너를 노리는지를. 네가 지닌 청산심법(靑山心法)이야말로 만마단의 마기(魔氣)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천적이기 때문이지."

설무극의 말에 설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청운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외부인을 향하던 차가운 경계심 대신, 새로운 감정이 그 눈 속에 일렁이고 있었다.

빙궁주는 전각 밖의 어두운 설산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은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의 음성은 만년설보다 묵직하게 전각을 채웠다.

"환대는 이제부터다. 북해의 모든 힘을 빌려주마. 혈영회의 뿌리를 뽑고, 네 스승의 원한을 갚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