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NOVEL

제16장. 잠식하는 어둠 (蠶食之黑暗)

빙궁주 설무극과의 동맹이 체결된 그날 밤, 빙궁의 외곽 객전(客殿)에는 모처럼의 긴장 완화가 감돌았다. 남궁휘는 빙궁이 마련해 준 온돌방에서 곤한 잠에 빠졌고, 소설은 천기각에 전할 빙궁의 정보를 정리하느라 촛불 아래서 붓을 놀리고 있었다.

하지만 청운만은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창밖의 매서운 눈보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틀에 쌓인 눈이 바람에 깎여 나가듯, 그의 마음속에도 형체 없는 불안이 조금씩 깎여 들어오고 있었다.

"스승님, 이제야 당신의 흔적을 좇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군요."

녹슨 검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창밖의 어둠 너머로 빙궁 무사들이 순찰하는 횃불의 궤적이 보였다. 그 규칙적인 움직임 속에서 미묘한 불규칙이 청운의 눈에 걸렸다. 동쪽 순찰로에 횃불 하나가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확신으로 굳어지지 않은 감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빙궁의 정막(靜寂)을 깨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만년설의 장벽에 부딪혀 되돌아온 메아리가 비명을 몇 배로 증폭시키며, 빙궁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으아악! 내... 내 몸이! 타오른다!"

청운은 검을 움켜쥐고 비명이 들린 연무장(演武場)으로 신형을 날렸다. 객전에서 연무장까지의 거리는 삼백 보(步)가 넘었으나, 낙엽수(落葉隨)의 보법으로 열 번의 호흡 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설희와 빙궁의 무사 십여 명이 도착해 있었으나, 그들은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경악에 찬 눈으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빙궁의 외성(外城) 호위대장이자 충직하기로 소문난 현상(玄相) 장로였다.

평소 인자하던 그의 얼굴은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전신의 혈관이 검붉게 튀어나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피부 위를 꿈틀거렸고, 그의 눈동자에는 이성(理性) 대신 핏빛 광기만이 가득했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짐승의 신음이었다.

"현상 장로님! 정신 차리세요!"

설희가 세검을 쥔 채 외쳤으나, 현상은 그녀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다.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주변의 석등(石燈)을 박살 냈다.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무사들이 급히 몸을 피했다. 현상이 휘두르는 손끝에서는 빙백신공의 맑은 냉기가 아닌, 기괴하고 탁한 흑적색(黑赤色)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만마단(萬魔丹)의 마기가 그의 공력을 잠식한 것이다.

"물러서시오! 그분은 이미 자아를 잃었소!"

청운이 설희를 한 팔로 밀쳐내며 현상의 정면에 섰다. 현상은 생기(生氣)를 감지하자마자 폭발적인 속도로 돌진해왔다. 마기에 오염된 장풍(掌風)이 청운의 어깨를 스쳤다. 도포가 찢기며 살점이 드러났으나, 청운은 피하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면 현상의 마기가 폭주하여 전신이 자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낙엽검법의 초식(招式) 대신, 청산심법(靑山心法)의 내공을 양손에 응축했다. 맑은 산의 기운이 양 손바닥 위로 푸른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청산불변(靑山不變) — 정심환원(正心還元)!

청운의 손바닥이 현상의 가슴 한가운데를 힘껏 밀어붙였다. 뼈가 울리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푸른빛과 흑적색의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두 기운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바람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연무장의 눈을 동심원 모양으로 밀어냈다. 현상의 전신이 경련하며 검은 피를 토해냈다.

"커헉... 아, 아아..."

마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청운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맑고 정순한 도가(道家)의 내기가 현상의 단전(丹田)에 깊이 박힌 마기를 하나씩, 실타래를 풀 듯 정화해 나갔다. 청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기를 정화하는 일은 그의 내력에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수 분간의 사투 끝에, 현상의 눈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고 그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설마... 정말로 만마단의 기운을 억누르다니."

설희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중원의 파문 제자가 빙궁의 장로도 이기지 못한 마기를 손바닥 하나로 정화하다니. 그것은 전장에서의 무용(武勇)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이였다.

정신을 차린 현상이 가냘픈 목소리로 청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누... 누군가 내 술잔에... 그 약을... 조심하게... 빙궁의 그림자 속에... 적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현상은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 청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빙궁의 어두운 복도를 응시했다. 순찰 횃불의 빈자리가 다시 떠올랐다. 첩자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 속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