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얼어붙은 첩자 (凍結之間諜)
현상 장로의 폭주 사태가 일단락된 후, 빙궁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무사들은 순찰을 강화했고, 연무장의 파손된 석등은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빙궁의 무사들 사이에는 곪아 터진 상처처럼 불안감이 번지고 있었다. 동료의 술잔에 독을 넣은 자가 같은 지붕 아래 숨어 있다는 사실이, 얼음으로 세운 성벽보다 견고했던 동문(同門)의 신뢰를 좀먹고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서로의 잔을 의심하는 눈빛이 오가기 시작했다. 둘씩 짝을 지어 순찰하던 무사들이 혼자 걷는 것을 꺼려했고, 밤마다 빙궁의 복도에서는 미세한 발소리에도 칼을 빼는 소동이 되풀이되었다.
청운은 내력을 회복하는 대신, 현상 장로가 머무는 빙혼실(氷魂室)의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겼다. 현상이 깨어나 입을 열면, 범인은 반드시 그를 침묵시키려 올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덫이었다.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오. 그대의 내력이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범인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오?"
"범인도 초조하오. 초조한 자는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지. 그 실수를 놓칠 순 없소."
청운의 눈에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설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그녀 역시 빙혼실의 반대편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청운이 빙혼실 깊숙이 자리를 잡은 지 한 시진(時辰)쯤 지났을 때, 의외의 방문자가 나타났다.
"청운 오라버니, 여기 있었네요."
그림자 속에서 소설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기각에서 익힌 잠행술은 이런 순간에 제 빛을 발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 조각이 들려 있었다. 촛불에 비친 조각 표면에 검붉은 잔여물이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현상 장로님이 쓰시던 술잔 주변에서 찾았어요. 잔 자체는 세척되어 있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이 파편만은 치우지 못한 모양이에요."
소설은 파편을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붉은빛 아래서 검붉은 가루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건 중원에서만 자라는 만마초(萬魔草)의 찌꺼기예요. 뿌리를 갈면 이런 검붉은 분말이 남거든요. 특이한 건, 이 분말에서 아주 미세하게 소금기가 느껴진다는 거예요. 보통 만마초 분말에는 없는 성분이죠."
청운이 미간을 좁혔다. 소설이 말을 이었다.
"빙궁의 식재료 중 소금은 전량 외부에서 수입해요. 그런데 소금 보급을 담당하는 인물은 빙궁 안에 단 한 명뿐이에요. 바로 보급 창고를 관리하는..."
"대제자 운비(雲飛)."
설희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잘린 유리처럼 날카롭게 떨어졌다. 그녀의 안색에 충격과 부정이 교차했다. 운비는 설희가 직접 검술을 가르친 수제자이자, 빙궁의 차세대를 이끌 인재로 점찍어 두었던 존재였다.
"아직 단정은 이르오. 하지만 한 가지 더. 범인은 현상 장로가 깨어나 입을 여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겠지. 이미 한 번 실패한 이상, 더욱 조급해져 있을 것이오."
청운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깊은 밤, 빙혼실 밖의 순찰 무사가 교대하는 사각(死角)의 시간이 찾아왔다. 순찰 간격은 반각(半刻)이었으나, 교대 순간에는 눈 한 쌍이 빠지는 공백이 생겼다. 바로 그 틈을 타 빙혼실의 문이 아주 미세한 소리도 없이 열렸다. 경첩에 기름을 먹인 것이 분명했다. 미리 준비한 자의 소행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보법이 지극히 정제되어 있었다. 발바닥 전체가 아닌 발끝만으로 얼음 바닥을 디디는 특수한 경공(輕功)이었다. 빙궁 무사의 기본기가 체화된 자의 걸음이었다.
그림자는 잠든 현상 장로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소매 속에서 검은 독침(毒針)을 꺼내 들었다. 침 끝에는 독액이 한 방울 맺혀, 희미한 촛불 아래서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그것이 현상의 경동맥(頸動脈)을 향해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챙!
어둠 속에서 푸른 검광(劍光)이 번뜩였다. 독침을 든 손목을 정확히 겨냥한 일격이었다. 침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울렸다.
"빙궁의 소궁주께서 직접 보초를 서 주실 줄은 몰랐겠지."
청운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짐과 동시에, 방 반대편에서 설희가 서늘한 냉기를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세검의 끝이 달빛처럼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림자는 동요한 듯 신형을 뒤로 날렸으나, 출입구에는 이미 소설이 가는 철사(鐵絲)로 만든 경보진(警報陣)을 설치한 뒤였다. 삼면이 막힌 완벽한 포위였다.
"가면을 벗어라. 빙궁의 제자복을 입고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설희의 외침에 그림자가 멈칫했다. 이윽고 탁한 웃음소리가 빙혼실을 채웠다. 복면을 벗어 던진 얼굴은 설희의 직속 호위무사이자 빙궁에서 장래가 촉망받던 대제자, 운비(雲飛)였다. 설희의 안색이 돌처럼 굳었다.
"운비... 네가? 내가 직접 검을 가르쳤건만..."
설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운비는 항상 가장 먼저 연무장에 나타나 가장 늦게까지 검을 휘두르던,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 넘치던 제자였다. 그 성실함의 이면에 이런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소궁주, 그 차가운 정의감이 꼭 늙은 궁주를 닮았군요."
운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회한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바라보는 눈에는 광적인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내딛자, 전신에서 현상 장로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흑적색의 마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설무극 그 늙은이는 만마단의 위대함을 몰라보고 고결한 척을 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빙궁만 천 년 전 얼음 속에 갇혀 있어요. 혈영회의 주군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힘,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경지를!"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빙궁 제자복의 봉합선이 찢어졌다. 그는 이미 스스로 만마단을 복용한 초기 중독 상태였다.
"이 추운 감옥에서 벗어나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을 거부할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운비가 포효했다. 그러나 청운은 그 광기어린 외침 속에서 다른 것을 읽었다. 두려움이었다. 혹한의 변방에서 태어나 혹한 속에서 늙어갈 운명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 곪아 온 원한이 만마단이라는 달콤한 독에 삼켜진 것이었다.
"배신자의 말로(末路)는 오직 하나뿐이다."
청운이 검을 고쳐 쥐었다. 현상 장로를 정화하느라 내력이 온전치 않았으나, 배신자를 향한 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차갑고 강철보다 단단했다. 설희 역시 이를 악물고 세검을 들어 올렸다. 제자를 향해 검을 드는 것이 이토록 무거울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검끝에 서린 냉기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빙궁의 밤을 깨우는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