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NOVEL

제3장. 혈영낙엽 (血影落葉)

쿠릉!

만화루 이층의 육중한 목조 문이 단숨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붉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방 안을 가득 메웠고, 그 너머로 핏빛 장포를 걸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기괴하게 굽은 혈도(血刀)가 들려 있었다. 부서진 문짝의 파편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으니, 그가 내뿜는 마기(魔氣)의 열량이 얼마나 극렬한지를 짐작케 했다.

"청성파의 파문 제자라더니, 기세만큼은 일문의 장문인 못지않구나."

적영(赤影)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거칠었다. 그는 혈영회의 십대 호법 중 한 명으로, 잔인하기로 소문난 절정(絶頂)의 고수였다. 핏빛 장포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무수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살인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흉흉한 칼자국들이었다.

청운은 대답 대신 등 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녹슨 듯 거친 표면의 검이었으나, 청운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검신(劍身)을 따라 푸른 광채가 물결치듯 흘렀다. 청산심법(靑山心法)의 정화가 검 끝에 맺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청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영이 움직였다. 혈도가 허공을 가르자 붉은 강기(罡氣)가 반월형으로 펼쳐지며 방 안을 뒤덮었다.

콰광!

방 안의 가구들이 강기의 여파에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찻잔이 산산이 깨지고, 자단목(紫檀木) 탁자가 두 동강이 났다. 청운은 발끝을 살짝 튕기며 신형을 뒤로 물렸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볍고 유려했다. 적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류(一流)의 정점을 밟고 선 자의 보법(步法)이었다. 아직 절정에 완연히 들어선 것은 아니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민첩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낙엽검법(落葉劍法) 십팔수(十八手) - 추풍낙엽(秋風落葉)!"

청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해 보이는 찌르기였으나, 적영의 눈에는 수십 개의 검영(劍影)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가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낙엽이 서로의 궤적을 가리듯, 실체와 환영이 뒤얽혀 도무지 본체를 가려낼 수 없었다. 적영은 당황하며 혈도를 휘둘러 검영을 쳐냈으나, 실체는 없었다.

"환영인가!"

"아니, 실(實) 속에 허(虛)가 있고, 허 속에 실이 있을 뿐이다."

청운의 목소리가 적영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적영의 사각을 파고든 청운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적영은 급히 몸을 틀어 치명상을 피했지만, 핏빛 장포의 한 자락이 힘없이 잘려 나갔다. 상처는 얕았으나, 절정 고수의 몸에 검을 닿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적영의 눈에 살기가 등등하게 올랐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혈도로 그어 피를 묻혔다. 그러자 혈도에서 뿜어지는 붉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며 피가 끓는 듯한 역겨운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혈도의 날이 핏빛으로 번들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혈영회의 금지된 무공, 혈마공(血魔功)인가."

청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가 목숨을 건 비기를 꺼내 들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적영의 혈도가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청운의 심장을 노렸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공간을 잠식하는 듯한 압도적인 압력이었다. 붉은 강기가 혈도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이루며 출구를 남기지 않았다.

청운은 검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온몸의 내공을 단 한 점에 집중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청산심법의 정수가 검신을 타고 흘러, 검끝 일점에 맺혔다.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듯 정지했다.

"낙엽검법 비기(秘技) - 풍운참(風雲斬)!"

키이이잉!

맑은 검명(劍鳴)이 만화루 전체를 진동시켰다. 푸른 검광이 일섬(一閃)하자, 적영의 붉은 강기가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퍼억!

적영의 어깨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절정의 호법인 자신의 혈마공을 일격에 찢어낸 검기라니.

"이, 이 검력은... 단순한 청성파의 무공이 아니야! 네놈, 정체가 뭐냐!"

청운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스승님의 원수를 쫓는 그림자일 뿐이다."

적영은 품속에서 검은 연막탄을 터뜨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기억해라. 혈영회의 주군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날, 낙양은 피의 바다가 될 것이다!"

연기가 걷혔을 때 적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운은 검을 칼집에 넣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색이 평소보다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방금 내지른 비기가 그의 내력을 상당 부분 소모했음을 의미했다. 팔뚝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풍운참은 일류 정점의 내력을 순간적으로 절정의 위력으로 끌어올리는 초식이니, 그 반동이 가혹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때, 구석에 숨어 있던 소설이 달려 나왔다.

"대단해요! 적영을 물리치다니... 하지만 청운 소협, 방금 그 자가 남긴 말이 마음에 걸려요. '주군'이라니, 혈영회의 수장이 낙양에 와 있다는 뜻일까요?"

청운은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적영의 잘린 옷자락을 응시했다. 붉은 피 위로 기이한 검은 반점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피 속에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점은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