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빙주(氷主)의 침묵 (氷主之沈黙)
청운이 천장에서 은제 단추를 발견하기 한 시진(時辰) 전. 빙궁의 최심처(最深處), 빙궁주 설무극의 개인 집무실인 빙룡각(氷龍閣)에는 이미 한 차례 피바람이 불고 지나간 뒤였다.
빙룡각은 만년빙(萬年氷)을 깎아 만든 팔각형의 전각으로, 벽면 전체가 투명한 얼음이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으나, 안에서는 설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설무극은 옥안(玉案) 앞에 앉아 서찰을 읽고 있었다. 빙백신공의 내력이 자연스럽게 순환하며 그의 주위에 미세한 얼음 결정이 항시(恒時) 떠돌고 있었다.
스스슥...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알아채지 못할 파동이었으나, 설무극의 귀에는 삼 장(丈) 밖에서 모래알이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형체조차 희미한 혈영회의 무영살수(無影殺手) 셋이 공기를 가르며 그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천장, 좌측 벽면의 기혈(氣穴), 우측의 서가(書架) 뒤. 세 방향에서 동시에 접근하는 삼합절살진(三合截殺陣)이었다.
그들이 뻗은 비수(匕首)에는 만마단의 정수가 농축된 극독이 발라져 있었다. 검은 액체가 칼날 위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단 한 번의 피부 접촉만으로도 경맥(經脈)을 마비시킬 수 있는 맹독이었다.
그러나 설무극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북해의 주인 앞에서 그림자 장난이라니. 어디서 배운 간이냐."
징―!
설무극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파동이 빙룡각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공기가 찰나에 동결(凍結)되었다. 비수를 든 채 허공에 떠 있던 세 명의 살수는 움직임 도중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동자가 굴러가던 방향, 손가락의 미세한 경련, 발끝이 벽면을 차려던 각도까지 완벽하게 정지한 채. 정교한 얼음 조각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빙백신공(氷白神功) 십성(十成)의 경지. 접촉 없이 공기 자체를 매개로 삼아 적을 동결시키는 절대의 영역이었다.
콰장창!
설무극이 손목을 가볍게 비틀자 공기의 진동이 얼어붙은 살수들에게 전해졌다. 세 구의 얼음 조각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핏빛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설무극의 옷에는 한 점의 얼룩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그 순간이었다.
파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검은 실선(絲線) 하나가 설무극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수의 몸속에 미리 심어 둔 것이었다. 살수들의 죽음 자체가 발동 조건이었던 기관(機關). 혈영회의 주군이 보낸 만마심부침(萬魔心腐針)이었다.
설무극의 눈이 찰나 좁혀졌다. 빙기(氷氣)를 응축한 손가락으로 침을 쳐냈다. 그러나 침 끝에서 검은 연기가 폭발하듯 퍼지며 그의 손가락과 전완(前腕)을 감쌌다. 마기(魔氣)는 피부를 뚫지 못했으나, 연기 속에 녹아 있던 극미세한 마독(魔毒)의 입자가 호흡을 통해 폐부(肺腑)로 스며들었다.
설무극이 즉각 빙백신공을 운기하여 폐 안의 마독을 동결시키려 했으나, 이 독은 얼음에 저항하도록 조제된 것이었다. 동결시키면 깨어나고, 태우면 퍼지고, 내력을 운용하면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교활한 독이었다.
'크윽... 이 독기는 내력을 운용할수록 심장을 갉아먹는구나. 궁극적으로 내가 빙백신공을 쓸 수 없게 만들려는 속셈이로군.'
설무극은 깊은 내식(內息)으로 마독의 확산을 억제했다. 완전한 정화는 불가능했으나, 확산 속도를 늦추는 것은 가능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내력을 아끼면 마독의 침투는 느려지지만, 빙궁주로서의 위엄과 힘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빙궁에는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시진 후. 청운 일행과 삼대 호법이 소집된 만년한청전(萬年寒淸殿).
설무극은 옥좌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은색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안색은 다소 창백했으나, 빙궁주의 위엄이라는 갑옷이 그 이상을 가려주고 있었다. 옥좌 팔걸이를 쥔 오른손은 여전히 단단했으나, 무릎 아래로 감춘 왼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독과 싸우는 처절한 인내가 그 떨림 속에 숨겨져 있었다.
삼대 호법이 옥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白) 호법은 거구의 노인으로, 눈 위의 흉터가 전장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척(脊) 호법은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의 여인이었다. 고(古) 호법은 셋 중 가장 젊었으나, 그의 눈에는 오래된 세월이 담겨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빙궁에 반평생을 바친 충신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설무극의 시선이 천천히 세 호법을 훑었다. 청운은 그 시선 속에 포식자의 인내가 서려 있음을 읽었다.
"삼대 호법이여. 운비의 배신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터. 이것은 빙궁 창건 이래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다."
설무극의 음성은 태산(泰山)처럼 무거웠다. 세 호법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오늘 밤, 빙궁의 비전 창고(秘傳倉庫)를 개방하겠다."
이 한마디에 세 호법의 눈빛이 일제히 흔들렸다. 비전 창고에는 빙백신공의 비급(秘笈)과 빙백신주를 비롯한 빙궁의 모든 보물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개방한다는 것은 혈영회의 목표물을 꺼내 놓겠다는 뜻이었다. 미끼를 던지겠다는 선언.
"궁주님, 그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백 호법이 무거운 음성으로 간언했다.
"위험하지. 하지만 쥐를 잡으려면 먹이가 필요한 법이다."
설무극의 시선이 청운에게 향했다. 그 눈빛에는 말로 전하지 못하는 밀명이 담겨 있었다. '내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네가 나의 눈이 되어라.' 청운은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오직 청산심법을 지닌 그만이 마기를 감지하고, 마독에 오염된 자를 가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난 후, 세 호법이 차례로 전각을 빠져나갔다. 청운은 그들의 등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셋 중 하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속으로 혈영회의 주군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설무극은 텅 빈 전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옥좌의 팔걸이 위에 놓인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검어져 있었다. 마독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