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월하잠룡 (月下潛龍)
만화루 지하 깊숙한 곳에 마련된 비실(秘室). 사방이 두꺼운 석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외부의 어떤 기척도 차단된 천기각의 은신처였다. 벽면에 박힌 야명주(夜明珠)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어, 등불 없이도 실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축축한 돌벽에서 스며드는 한기가 오히려 불타는 듯한 경맥(經脈)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되는 듯했다.
청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청산심법(靑山心法)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미세하게 푸른 증기가 피어올랐으나, 평소보다 그 기세가 약하고 불안정했다. 적영과의 전투에서 내뿜은 풍운참(風雲斬)은 그만큼 그의 근원을 깎아먹는 일격이었다. 단전 깊숙이 자리 잡은 내력의 씨앗은 여전히 건재했으나, 그것을 끌어올릴 경맥이 과부하로 신음하고 있었다.
"청운 소협, 이 약초탕을 좀 드셔보세요. 기혈(氣血)을 보하는 데 특효인 백년하수오가 들어갔어요."
소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발을 내려놓았다. 진한 약재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청운은 천천히 눈을 뜨고 사발을 들었다. 쓴맛이 혀끝을 자극했지만, 곧이어 따뜻한 기운이 단전(丹田)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메마른 경맥에 물이 스미듯, 조금씩 기혈이 윤택해지기 시작했다.
"고맙소, 소설 낭자. 덕분에 기운이 좀 돌아오는구려."
청운이 사발을 내려놓자, 소설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곧 심각하게 굳었다.
"그나저나 소협, 할아버지가 그 옷자락에 묻은 피를 분석해 보셨는데요... 결과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소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탁자 위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올려두었다. 그 안에는 적영의 옷자락에서 추출한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야명주의 빛을 받아 액체가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치 병 안에서 무언가가 살아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단순한 피가 아니에요. 전설 속의 마도(魔道) 영약인 '만마단(萬魔丹)'의 찌꺼기라고 해요. 복용하면 단시간에 내공을 폭발시키지만, 심성을 파괴하고 혈관을 검게 부식시키는 금단(禁丹)의 약이죠. 혈영회가 만마전(萬魔殿)의 비기까지 손에 넣었다는 증거예요."
청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혈영회가 단순히 정파에 원한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과거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만마전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스승 일엽이 목숨을 잃은 것도, 혹시 이 거대한 음모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가슴 안의 쇳조각 증표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지하비실의 입구 쪽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천기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이는 화려한 백색 장포를 입고 허리에 명검 '창궁검(蒼穹劍)'을 찬 수려한 청년이었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명문대파의 기품이 배어 있었으나, 턱을 치켜든 자세에서는 자부심을 넘어선 오만함이 묻어났다.
"무림맹의 조사관이자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차남, 남궁휘(南宮輝)라 하오."
청년은 오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청운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청성파의 파문 제자라는 청운에 대한 멸시와, 동시에 만화루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의 무력에 대한 경계심이 공존하고 있었다. 녹슨 검과 낡은 도포의 행색을 보며 콧등을 찌푸렸으나, 방 안에 잔류한 청산심법의 기운을 감지한 듯 눈빛이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
"객잔과 기루를 박살 내고 혈영회의 호법을 쫓아낸 자가 바로 당신인가? 무림맹의 허가 없이 낙양에서 소란을 피운 죄를 물어야겠으나, 상대가 적영이었으니 이번만은 넘어가 주지. 대신, 당신이 얻은 정보를 모두 맹으로 넘기시오."
남궁휘의 명령조 말투에 청운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빈 약사발을 만지작거렸다.
"정보는 거래하는 것이지, 상납하는 것이 아니오. 남궁 소협의 무림맹이 혈영회의 발뒤꿈치라도 잡았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소만."
"이놈이...!"
남궁휘의 손이 검병으로 향했다. 지하비실 안에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다.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과 청운의 낙엽검법이 당장이라도 충돌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야명주의 빛이 두 사람의 검기에 짓눌려 한 순간 깜박였다. 소설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할아버지를 돌아보았으나, 천기노인은 두 눈을 감은 채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막을 생각이 없는 사람의 고요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