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빙백의 사슬 (氷白之鎖)
세 번째 합(合)이 무너졌다. 남궁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일어서지 못했고, 청운은 무릎을 꿇은 채 검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닿기도 전에 얼어 구슬이 되었다. 설희만이 간신히 서서 빙궁의 방어진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적마의 혈도가 다시 암적색 파동을 일으켰다. 숨이 끊어질 듯한 청운과 바닥에 엎드린 남궁휘를 한꺼번에 짓누르려는 일격이었다. 동굴 벽면의 얼음이 적마의 마기에 반응하여 붉게 물들었다. 만년한빙이 오염되고 있었다. 천 년을 버텨온 얼음이 마기 앞에서 검붉은 눈물을 흘리듯 녹아내렸다.
그 순간, 적마의 발밑에서 얼음이 솟았다.
"북해의 땅에서 감히 조상들의 영기를 더럽히지 마라!"
설희였다. 은색 머리칼이 빙백의 진기에 반응하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차분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눈가에 핏줄이 선 얼굴. 눈동자마저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빙궁 최후의 비기―빙백진쇄(氷白眞鎖). 단전을 태워 시전하는 비술이었다. 한 번 펼치면 시전자의 내공이 영구히 깎여 나간다. 설무극이 딸에게조차 함부로 전수하지 않으려 했던 금기. 설희는 그것을 지금 제 몸으로 펼치고 있었다.
쿠르릉!
제단 주변의 만년한빙이 거대한 사슬로 변형되며 적마의 사지를 감아 올랐다. 적마가 마기를 폭발시켜 끊으려 했으나, 사슬에 실린 것은 설희의 생명력 자체였다. 끊어지기는커녕 적마의 살갗을 파고들며 마기를 빨아들였다. 사슬이 조일 때마다 적마의 체내에서 검붉은 기운이 빠져나와 얼음에 흡수되었다. 동굴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입김이 얼어 결정이 되었다.
"버러지 같은 계집!"
혈도를 휘둘러 사슬을 끊으려 발악했다. 사슬 하나가 깨졌다. 설희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다리가 떨렸다. 무릎이 꺾이려 했다. 그러나 적마를 향해 뻗은 두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손바닥의 피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생명력을 쥐어짜는 대가였다.
"지금입니다!"
설희가 피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목이 쉬어 끝이 갈라졌다.
"내력이 다하기 전에 놈을 끝내세요!"
"남궁 형!"
"가시오!"
남궁휘가 이를 악물었다. 잘린 오른팔의 봉합이 진작부터 풀려 있었다. 핏빛 붕대 아래로 피가 흘러 바닥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을 거꾸로 쥐고 피투성이 바닥을 박찼다. 왼손 하나에 모든 것을 실었다. 검 끝이 적마의 가슴팍에 박힌 마기의 핵을 타격했다.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기교가 아니었다. 투지로 만든 균열이었다. 그러나 반동이 왔다. 남궁휘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닿았다. 그러면서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 틈을 청운이 파고들었다. 바닥을 박차며 공중으로 솟았다. 신형을 비틀어 빙각의 왼손을 내질렀다. 심장의 서리가 갈비뼈를 뚫고 번지는 감각. 뼛속에서 얼음이 자라나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세계가 붉은 안개로 잠겼다. 하지만 표적은 보였다. 적마의 심장. 그곳만이 선명했다.
빙각수(氷刻手) ― 극지정화(極地淨化)!
청운의 왼손이 적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한옥천의 냉기와 청산의 정기가 적마의 체내에 뿌리박힌 만마단의 독기를 뿌리째 얼렸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려다 허공에서 얼어붙어 우박처럼 쏟아졌다.
"끄아아아악!"
적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 이럴 수는... 주군께서... 만마전의..."
말이 끝나지 못했다. 거대한 신형이 안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쩍, 쩍, 쩍. 갈라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리고 산산조각. 하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북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대호법의 최후.
동굴이 고요해졌다. 적마가 부서진 자리에 하얀 가루만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위로 동굴 천장에서 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또르르, 하는 소리가 정적 속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만년한빙이 본래의 순수한 냉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벽면의 붉은 균열이 서서히 바래지며 본래의 투명한 빛을 되찾아갔다.
설희가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은색 머리칼이 바닥에 부채꼴로 펼쳐졌다. 숨은 붙어 있었으나 의식이 없었다. 청운과 남궁휘도 무기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거친 숨소리만이 얼음 벽에 부딪쳐 돌아왔다.
지옥 같던 천년한빙동에, 맑은 북해의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하얀 가루를 쓸어 동굴 밖으로 보냈다. 적마의 잔해였다. 그것이 눈과 섞여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