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북해의 마지막 눈 (北海之終雪)
적마가 사라진 뒤, 먹구름이 걷힌 북해에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바람에서 마기의 비린내가 사라지고, 깨끗한 눈 냄새만 남았다.
보름이 흘렀다. 만년한청전 의무실에서 빙궁의 비전 영약으로 집중 치료를 받은 설희가 비로소 제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눈빛에 힘이 돌아와 있었다. 빙백진쇄의 대가로 내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남궁휘는 보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왼손 검술을 갈았다. 매일 새벽, 의무실 밖 빈터에서 허공을 수백 번 베었다. 검 끝이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쪽 팔을 잃은 검수가 새로운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은 더디었으나, 궤적 하나하나에 전날의 것보다 선명한 결기가 서렸다.
"그대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북해는 이미 만마단의 마수에 잠식되었을 것이오."
빙궁주 설무극이 청운 앞에 섰다. 노인의 목소리에 한 문파를 구원받은 자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친 손이 품속에서 푸른 비수 하나를 꺼냈다. 만년한철(萬年寒鐵)을 벼려 만든 것. 칼날이 북해의 빛을 머금어 깊고 고요한 푸른빛을 뿜었다. 주변의 냉기가 비수 끝에 모여들어 미세한 결정을 이루었다.
"북해빙궁의 영원한 맹약이오. 이것을 받아주시오."
청운이 왼손으로 비수를 받았다. 금속이 빙각수에 닿자 푸른 서리가 번졌다가 가라앉았다. 같은 한기를 품은 것끼리의 교감. 비수가 청운의 손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청운은 비수를 품에 넣으며 깊이 포권했다.
"은혜는 잊지 않겠소."
설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손으로 청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그것이 이 노인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친밀함이었다.
떠나기 전, 일행은 빙궁에서 가장 높은 옥루 정자에 올랐다.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얀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가 흐릿했다. 햇빛이 눈 위에 부서져 만든 빛의 알갱이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어디선가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멀리 들렸다. 북해가 다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소설이 짐을 멘 채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북해는 무섭고 추웠지만...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네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시선이 설원 위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흘린 피와, 잃어버린 것들과, 그럼에도 지켜낸 것들을 되새기듯. 남궁휘는 빈 오른쪽 소매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었다. 후회가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설희가 청운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왼손은 여전히 얼음장 같소.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뜨겁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압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중원의 여정이 순탄치 않겠지만, 천하 무림이 등을 돌려도 북해빙궁은 언제나 그대 뒤에 있을 것입니다."
설희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북해 사람들은 한 번 맹약을 맺으면 죽어서도 지킨다. 그것은 의리가 아니라 혈맥에 새겨진 법도였다.
청운은 붕대를 새로 감은 왼손을 움켜쥐었다.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무디었고, 심장의 한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피를 나누며 얻은 동료들의 신뢰가, 고통을 견디게 하는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었다.
"설희 낭자도 몸조리 잘 하시오. 다시 만나는 날, 쌍검을 겨루어 보겠소."
설희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리고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북해 사람다운 절제된 웃음이었다.
남궁휘가 왼손의 애검을 들어 허공에 한 획을 그었다. 말 대신 검으로 전하는 작별. 팔 하나를 잃었으나 좌절은 간데없고, 궤적에는 외팔 검수로서의 새로운 결기가 서려 있었다. 바람이 그 검기를 따라 한 줄기 길게 불었다.
설령관의 거친 고개를 넘었다. 산등성이를 넘는 순간 바람이 달라졌다. 칼처럼 날카롭던 북해의 삭풍 대신, 흙과 풀 냄새를 머금은 중원의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마침내 중원의 땅을 밟았을 때, 등 뒤로 북해의 마지막 눈이 조용히 흩날렸다. 맑고 고요한 눈이었다. 작별인 듯, 축복인 듯. 청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한 발짝이 유난히 길었다.
앞에는 낙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해의 마수보다 더 깊이 숨어 있는, 진정한 적들의 그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