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장. 야행 (夜行)
밤이 깊었다. 안가의 등잔을 끄자 어둠이 물처럼 밀려와 방 안을 삼켰다. 벽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소설이 마지막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날갯짓 소리가 멀어지자 적막이 돌아왔다. 죽간에 적힌 낙양 성문의 순찰 시각과 경비 배치를 훑은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시(寅時) 초에 서문 교대가 있어요. 그 틈을 노려야 합니다."
남궁휘가 청운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반나절 전까지 가부좌를 유지하던 청운의 몸에서 냉기가 서렸다. 손을 맞잡는 순간 남궁휘의 손바닥에 성에가 맺힐 정도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아니었다.
"걸을 수 있겠소?"
"염려 마시오."
청운이 담담히 대답했으나 일어서는 동작이 한 박자 느렸다. 빙각의 한기가 단전을 넘어 심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면 한기가 역류하여 오장을 얼리고, 가만히 두면 한기가 서서히 심장을 잠식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이토록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있던가.
셋은 서책방 뒤편의 배수로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탁한 물을 헤치며 나아갈 때 쥐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습한 수로의 악취가 옷에 스며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살아서 이 성을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했다. 낙양의 밤거리는 고요했으나 평화로운 고요가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 무림맹의 순라가 횃불을 들고 돌았다. 삼보에 한 번씩 횃불이 지나갔고, 골목 어귀마다 검은 옷의 무인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타오르는 횃불의 기름 냄새가 밤바람에 실려 코끝을 찔렀다. 예전의 낙양에서는 볼 수 없던 삼엄한 경계였다.
"수배 방문(榜文)이 붙었군." 남궁휘가 담장 너머를 살피며 낮게 읊조렸다. 벽면에 걸린 방문에는 청운과 남궁휘의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마교와 내통한 흉도'라는 죄명 아래, 발견 즉시 포살하라는 맹주의 영이 찍혀 있었다. 청운은 그 글귀를 말없이 응시했다. 분노보다 씁쓸함이 먼저 치밀었다.
소설이 앞장섰다. 천기각의 정보원답게 낙양의 뒷골목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담을 넘고, 수로를 건너고, 빈 민가의 지붕 위를 밟아 소리 없이 이동했다. 기왓장 하나 흔들리지 않는 가벼운 발놀림이었다. 남궁휘가 한 팔로 청운을 부축하며 뒤를 따랐다.
서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청운의 발이 멈추었다.
"큭...!"
입술 사이로 흰 한기가 새어 나왔다. 사월의 밤공기가 따뜻한데도 청운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냉기가 흘러 땅 위의 풀잎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심맥을 타고 한기가 폭주한 것이다. 가슴 한가운데서 얼음 송곳이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를 어쩌나..." 소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궁휘가 망설임 없이 왼손으로 청운의 등에 장심을 대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미약하나마 남궁세가의 자양진기(紫陽眞氣)가 한기의 폭주를 억눌렀다.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외팔에 남은 내력만으로 타인의 심맥을 다스리는 것은 모래로 둑을 쌓는 격이었다.
"오래 버틸 수 없소. 서두르시오."
소설이 이를 악물었다. 작은 주먹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 서문의 횃불이 멀어지는 찰나, 셋의 신형이 성벽의 그림자를 타고 어둠 속으로 빠져나갔다.
성문을 벗어나자 달빛에 젖은 관도(官道)가 펼쳐졌으나 걸을 수 없었다. 관도에는 무림맹의 초소가 십 리마다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소설은 잠시 망설이다 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낙양에서 숭산까지 관도로 이틀, 산길로는 사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청운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아득한 거리였다.
달빛 아래 산등성이를 타고 걷는 셋의 모습은 처량했다. 한때 무림의 영웅이라 불리던 자들이 짐승처럼 쫓기며 야산을 헤매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청운의 몸에서 희미한 한기가 새어 나와 풀잎 위에 서리를 남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서리의 자국이 길처럼 이어졌다. 뒤따르는 자가 있다면 이보다 선명한 흔적은 없으리라. 남궁휘는 외팔로 청운을 부축하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소설은 삼 장 앞서 걸으며 쉼 없이 주위를 살폈다.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발밑에서 마른 가지 꺾이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새벽빛이 동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 셋은 낙양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산중 폐사(廢寺)에 몸을 숨겼다. 무너진 처마 아래 청운을 눕히자, 그의 입술이 이미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숨결이 닿는 곳마다 하얀 서리가 피어올랐다. 맥을 짚은 남궁휘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맥상이 심하오." 남궁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빙한(氷寒)이 심포(心包)까지 침범했소."
"숭산까지... 이틀." 소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버텨야 해요."
청운이 눈을 떴다. 핏기 없는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꺼지지 않았다.
"죽지 않겠소."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아직 밝혀야 할 것이 남았으니."
남궁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 서린 것은 걱정이 아니라 신뢰였다. 소설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울먹이는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했다.
폐사의 부서진 불상이 새벽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금박이 벗겨진 불상의 눈이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비인지 무심인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깨진 기왓장 사이로 새벽바람이 스며들어 불경 읊는 소리처럼 낮게 울었다.
낮 동안 번갈아 잠을 자고, 다시 밤이 오면 걷기로 했다. 멀리서 산새가 울었다. 숭산은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