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장. 천년의 백린 (千年之白鱗)
태백심곡(太白深谷)의 가장 깊은 곳. 빛조차 닿지 않는 영원의 암흑 속에서, 기이한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붉은 불꽃과 푸른 얼음의 기운이 엉켜 도는 한 그루의 고목(枯木). 가지 끝에 맺힌 영롱한 진액은 천 년의 세월 동안 음양(陰陽)의 조화를 빚어낸 천년화수목(千年花樹木)의 결정체였다. 청운의 끊어지는 숨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기연(奇緣)이 그들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 영약에 다가설 수는 없었다.
스르릉!
화수목을 둥글게 감싸 안고 있던 '거대한 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스윽 하고 고개를 쳐든 것은 기둥 굵기만 한 두 눈을 번뜩이는 천년백사(千年白蛇)였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백색의 비늘이 서로 마찰하며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토해냈다.
쉬아아아악!
백사가 아가리를 쩍 벌리자, 계곡의 독장(毒瘴)과는 차원이 다른 시퍼런 독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우측으로 십 보, 꼬리가 날아옵니다!"
어둠 속에서 소설(小雪)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렸다. 그녀의 열 손가락에 연결된 청음사(聽音絲)가 거대 요물의 움직임으로 인한 공기의 파동과 땅울림을 실시간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경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름드리나무 기둥만 한 뱀의 꼬리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바위가 두부처럼 으깨지며 파편이 튀었다. 무영보(無影步)를 펼쳐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소설이 차가운 식은땀을 흘렸다. 시야가 막힌 이곳에서 그녀의 감지가 없었다면 벌써 뼈도 추리지 못했을 공격이었다.
"덩치 큰 지렁이가 제법 앙탈을 부리네."
파편 먼지 속에서 자줏빛 치파오가 펄럭였다. 당귀비(唐貴妃)였다.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 가득 검은 쇠구슬(혈폭우)을 움켜쥐었다.
"어디, 그 잘난 강철 비늘도 찢어지나 볼까?"
당귀비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뱀의 거대한 머리를 향해 수십 개의 혈폭우를 쏟아부었다.
콰쾅! 콰아아앙!
연쇄적인 폭발이 백사의 안면과 목줄기를 강타했다. 동관의 골목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가공할 폭약이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힌 뒤 드러난 백사의 비늘은 겉면만 그을렸을 뿐, 치명상은 입지 않은 상태였다. 영물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신 분노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쯧, 가죽 한 번 더럽게 질기네."
당귀비가 혀를 차며 허리춤에서 붉은 채찍, 적사편(赤蛇鞭)을 뽑아 들었다. "정파 나리, 내력 낭비하지 말고 얌전히 숨어 있어. 내가 저놈의 껍데기를 어떻게든 까놓을 테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뱀의 거대한 몸통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그녀를 짓뭉개려 했지만, 당귀비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육신으로 백사가 뿜어내는 맹독을 고스란히 맞아가며 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채찍 끝의 갈고리가 폭발로 그을린 비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당귀비가 가장 지독한 맹독액을 쑤셔 넣었다.
"키야아아아악-!"
비늘 속으로 스며든 사천당가의 극독에 백사가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뱀의 거체가 고통에 요동치며 암벽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소설의 열 손가락에 묶인 청음사가 미친 듯이 떨렸다.
"목 아래 칠 척 부근! 비늘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소설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남궁휘(南宮煇)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의 잘려 나간 오른팔 끝에는 부러진 검 자루가 짐승의 가죽으로 흉악하게 결박되어 있었다. 내력은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텅 빈 단전 아래로 박박 긁어모은 상태였다.
파아아앗!
남궁휘의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외팔이기에 무너진 무게중심. 그러나 그는 그 불안정함을 오히려 극한의 회전력으로 승화시켰다. 몸이 기울어지는 반동을 검 끝에 모두 실었다. 명문 세가의 화려한 초식 따위는 버린 지 오래. 오직 살상(殺傷)이라는 본질 하나만을 위해 태어난 흉악한 살검(殺劍).
검신(劍身)에 옅은 청강(靑罡)이 서렸다. 당귀비의 맹독과 폭약에 찢겨 나간 백사의 역린(逆鱗). 남궁휘의 칼끝이 그 유일한 빈틈을 향해 벼락같이 꽂혀 들었다.
푸우우욱-!
강철을 뚫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궁휘의 검이 백사의 급소를 깊숙이 관통했다. 검신을 타고 뜨거운 뱀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백사의 거체가 허공에서 경직되었다. 그 거대한 두 눈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며, 태산이 무너지듯 계곡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땅이 뒤흔들리고 독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우……."
피투성이가 된 남궁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사의 사체에서 검을 뽑아냈다. 소설은 끊어진 청음사를 걷어내며 마침내 팽팽했던 긴장의 끈을 놓았다.
당귀비는 달랐다. 그녀는 뱀의 목덜미 위로 올라앉아 소매에서 은빛 해부도(解剖刀) 한 자루를 꺼냈다. 손놀림이 놀랄 만큼 정밀했다. 비늘 사이의 연결부를 정확히 찾아 들어가 가죽을 저며 내고, 독니 한 쌍을 뿌리부터 톡 소리가 나게 뽑아 유리병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턱 아래쪽을 가르자 밤송이만 한 검은 주머니가 드러났다. 천년백사의 독주머니(毒囊)였다. 당귀비는 그것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며 숨을 한 번 깊게 골랐다.
"이 정도 양이면," 그녀가 나직이 혼잣말했다. "낙양 한 골목쯤은 통째로 뒤집어엎을 수 있겠는걸."
소설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농담인지 선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당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리품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한편 내단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약속한 몫이었다. 남궁휘가 옥함을 열어 뱀의 가슴 깊숙이 박혀 있던 주먹만 한 붉은 구슬을 꺼내 조심스럽게 담았다.
어둠이 걷힌 계곡 중심에서, 천년화수목만이 붉고 푸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기연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