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출진(出陣) — 산을 내려가는 검
불 꺼진 화룡동에 이제 붉은 광석의 빛은 없었다. 열흘 동안 청운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 폭발이 광석들을 하나하나 바스러뜨렸기 때문이다. 동굴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이제 그 어둠은 청운에게 낯설지 않았다. 대신 청운이 내쉬는 숨결마다 얕은 빙화(氷花)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빛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손끝이 느꼈다.
4경(更)이었다. 하늘의 별이 가장 차갑게 박혀 있는 시각. 일행이 쌓인 피로를 추스르며 쓰러진 채 깊이 잠든 동굴 한쪽에서, 청운은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運氣調息)에 잠겨 있었다. 새로 길들인 극음의 기운은 거대했다. 마치 새로 얻은 팔다리처럼 아직 낯설어서, 의념(意念) 하나가 흔들릴 때마다 손끝에서 복잡한 기류가 어지럽게 뻗어 나왔다. 빙각의 저주를 '소유'한 것과 '지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전자는 한 순간의 각성으로 가능하지만, 후자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조식(調息)의 축적 위에서만 완성된다.
청운은 오른손 검지를 가만히 세웠다.
호흡을 가다듬고, 의념을 단전 아래 빙각 한기의 뿌리로 조용히 내려보냈다. 그 무저갱의 냉기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 흘려보내는 것. 손끝까지 그 흐름을 끌어올려 가느다란 한 줄기로 응축했다. 순간, 검지 끝에서 서리꽃 한 송이가 소리 없이 피어났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꽃 한 송이가.
그러나 그것이 닿은 동굴 벽이 단숨에 달라졌다.
솨아아-!
허리 높이부터 천장까지, 청운의 검지가 향한 방향으로 암벽 한 칸 전체가 새하얀 빙막(氷幕)으로 뒤덮였다. 소리조차 삼켜버리는 두꺼운 얼음이었다. 촛불 하나 없는 동굴 안에서 빙막이 내는 희미한 냉광(冷光)이 청운의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손가락 하나, 의념 하나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전에는 전력을 다해야 겨우 장심(掌心) 하나에 한기를 모을 수 있었다. 지금은 쉬는 숨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는 손가락을 거두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젊은이."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화룡진인(火龍眞人)이었다. 노인은 청운이 눈치채기도 전에 어느새 곁에 다가와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이 빙막으로 덮인 암벽을 천천히 훑었다. 노인의 표정에는 감탄도, 놀람도 없었다. 그보다 깊은 것 — 고요한 결별(訣別)의 빛이 있었다.
"맥을 보여주게."
청운은 말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화룡진인의 세 손가락이 맥문(脈門) 위에 가볍게 얹혔다. 한 식경(一食頃)의 침묵이 흘렀다. 촛불 하나 없는 동굴 안에서 노인의 눈은 감겨 있었다. 손가락을 통해 흐르는 기의 조류를 읽는 것이었다. 청운은 그 손끝이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았다. 빙각의 냉기가 더 이상 폭발적으로 뻗어 나오지 않고, 수맥처럼 일정하고 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제어의 증거였다.
노인의 눈썹이 한 번 깊게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
그는 손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
"이미 내가 볼 수 있는 경지를 넘었다."
작별이었다. 더 이상의 침이나 약석(藥石)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스승의 자리를 내준 것도, 제자의 자리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말로도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언가가 생겨 있었다. 청운은 두 손을 모아 깊이 머리를 숙였다.
"진인의 은혜, 어떤 갚음으로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빚 이야기는 관두게." 화룡진인이 무뚝뚝하게 손을 저었다. 그러나 잠시 뒤, 그의 목소리가 한 층 낮아졌다. 불꽃 없는 화롯가에서 날이 서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진인은 동굴 벽의 빙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극음(極陰)은 천하에서 가장 고독한 기운이다. 뜨거운 것들은 서로를 끌어당겨 더 크게 타오르지만, 극음은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 홀로 서야만 제 힘이 된다." 잠시 멈춤. "지배하면 산을 옮기고, 지배당하면 스스로를 잡아먹는다. 분하거나 외롭거나 무너질 것 같을 때, 그 기운에 몸을 맡기지 마라. 그것이 제 주인을 제일 먼저 노린다." 진인이 숨을 고른 뒤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조심해라. 극음은 흘려보낼 곳이 있어야 가라앉는다. 인기(人氣)가 겹겹이 쌓인 성 안에서는 네 기운이 길을 찾아 스스로 새어 나갈 것이다."
청운은 그 말 위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무공의 금기(禁忌)라면 외우면 그만이다. 그러나 진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극음의 기운은 고통이나 증오를 연료로 삼는다. 타오르는 분노, 찢기는 슬픔, 바닥을 드러낸 허무함 — 감정의 끝자락에서 그 기운은 가장 강해지고, 동시에 가장 위험해진다. 스승을 잃었을 때, 설희가 생명을 깎으며 쓰러지던 순간, 남궁휘의 팔이 잘려 나가는 것을 지켜봤을 때. 그 순간마다 몸속의 냉기가 스스로 불어오르려 했다. 분노와 고통이 극음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북해에서 의식이 무너지던 순간, 그 기운이 스스로를 삼키려 했다.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안다.
청운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빙막이 녹아내리는 동굴 벽을 바라보았다. 얼음이 조금씩 흘러내리며 바닥에 고이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이 동굴 안에서 처음 만들어낸 것이 녹아 없어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도 끝내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청운의 단전 아래 자리 잡은 것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깊어질 뿐이었다.
청운은 그 말을 고이 단전 아래 새겼다. 지금의 자신에게, 그것은 무공의 금기(禁忌)가 아니라 살아남는 법이었다.
여명이 산등성이를 넘어 스밀 무렵, 일행이 짐을 꾸렸다.
남궁휘(南宮煇)가 잘려 나간 오른팔 끝에 검을 묶는 방식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북해를 떠나 동관을 넘고 백사를 쓰러뜨리는 동안 수십 번 고쳐 맸던 그 매듭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는 더 천천히, 더 꼼꼼하게 결박의 위치와 각도를 조정했다. 매듭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손목을 작게 한 바퀴 돌려 검심(劍心)과 신체의 일체감을 확인했다. 가죽끈이 한 올이라도 느슨해지면 검의 중심이 틀어지고, 낙양의 싸움에서 그 차이가 목숨을 가른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당귀비가 그 모습을 팔짱을 낀 채 보다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이 판에 그리 꼼꼼하게 들여다볼 게 있소?"
"있소." 남궁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낙양에 들어서면 검을 뽑을 틈도 없이 싸움이 붙을 수 있소. 그때 묶임이 한 치라도 어긋나면 내 목이 달아나오."
당귀비가 코웃음을 쳤지만,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녀도 출진 전 반드시 연죽 독심(毒心)을 점검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것은 손가락 끝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때 소설(小雪)이 동굴 구석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들여다보다가 입술이 굳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암호 서신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천기각(天機閣)의 통신망을 통해 밤새 전달된 것이었다. 철면으로 찍힌 각인이 이미 해독된 상태였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소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음 낮았다. 청운과 남궁휘가 시선을 돌렸다.
"철면진인(鐵面眞人)." 소설이 서신을 펼쳐 들었다. "낙양 무림맹 수뇌부에 고문 자격으로 입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 대한 현상금이 전보다 세 배로 올랐습니다."
동굴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청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철면진인(鐵面眞人). 그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림맹이 부패하기 전, 맹주 직속의 칠대 장로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높았던 자. 철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 생사결(生死訣)을 비롯한 다섯 가지 절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 그리고 — 그가 한 번 결단을 내리면 끝까지 간다는 것. 고문 자격으로 입성했다는 말은 무림맹을 외부에서 지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내부 의사 결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남궁휘가 매듭을 마저 조이며 묻지 않고 생각했다. 현상금 세 배란 말은 곧 혈영회가 무림맹을 거의 손아귀에 쥐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을 잡아들일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 그리고 철면진인이 그 힘의 얼굴이 된 것이었다.
"철면진인."
그 이름을 중얼거린 것은 당귀비였다. 그녀가 연죽을 꺼내다 말고 잠깐 굳었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당귀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죽에 불을 붙이며 소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신 이쪽으로."
소설이 조심스럽게 건넸다. 당귀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의 내용을 훑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연죽의 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녀의 표정은 다시 나른한 사파풍의 무관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보았다. 당귀비의 검은 손톱이 서신을 쥔 손끝에서 잠깐 백지처럼 창백해졌다가 돌아온 것을.
소설은 시선을 거두었다. 묻지 않기로 했다. 당귀비가 말하지 않는 것을 캐내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 천기각(天機閣)은 정보를 모으되, 사람의 상처를 함부로 파헤치지 않는다.
청운은 그 광경을 보며 묻지 않았다. 당귀비가 저 이름에 반응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철면진인(鐵面眞人). 그 이름이 이미 두 사람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는 등에서, 하나는 가슴께에서. 때가 되면 말할 것이었다.
일행이 숭산(嵩山)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해가 막 한 뼘 오를 무렵이었다.
화룡진인은 동굴 입구까지 나와 서 있었다. 다시 올 것이라거나, 잘 가라거나 하는 말은 없었다. 벼랑 끝 소나무처럼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일행이 하나씩 굴을 빠져나왔다. 남궁휘가 먼저, 소설이 그 뒤를 따랐다. 당귀비는 진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예를 취했다. 사파 풍의 아무진 몸짓이었지만, 그나마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예였다.
청운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진인이 청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에 담긴 것은 — 청운을 처음 맞이하던 날의 눈빛과 달랐다. 그때는 죽어가는 자를 향한 의원의 눈이었다. 지금은 다른 것이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 제자도 아니고 후계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흘려보낼 수 없는 무언가를 전달한 자의 눈이었다.
다만 노인은 청운이 마지막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눈을 가늘게 좁히며 보았다. 청운의 등 뒤로 산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 끝에 아주 옅은 한기가 서렸다. 청운이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본 노인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가 다시 평온해졌다.
노인은 돌아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보지 않았다.
산길은 험했다. 숭산의 이른 봄은 아직 나뭇가지에 눈이 걸려 있었고, 바위틈에서 뿜어 나오는 새벽 안개가 발 아래를 가렸다. 해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빛이 안개 사이사이로 녹아들어, 산 전체가 잿빛과 흰빛이 뒤섞인 수묵화처럼 보였다. 바위에 남은 잔설(殘雪)은 발 디딜 때마다 바스러지며 짧은 탄식 같은 소리를 냈다.
일행은 말이 없었다.
내려가는 내내 청운은 앞장서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어지럽지 않았다. 북해에서 중원까지 도망치던 자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땅을 짚는 힘이 달랐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지기(地氣)를 가늠하듯 무게를 실었다가 떼어내는, 오랜 검행(劍行)의 몸이 되어 있었다. 그 등 뒤로 남궁휘가 묵묵히 따랐다. 새로 정비한 팔의 검 묶임이 제대로 앉아 있는지를 걷는 내내 감각으로 확인하면서.
소설이 뒤에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는 이미 나무들 사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진인도 없었다. 떠나는 자의 등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이 진인 나름의 방식이었다.
산 기슭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소설이 걸음을 늦추며 손을 들어 올렸다.
"기척 세. 전방 두 개, 측면 하나. 사 장(四丈) 이내로 좁혀오고 있습니다."
순간 일행의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좁아졌다. 오른쪽 수풀에서 마른 나뭇잎이 부스럭거렸다. 바람 탓이 아니었다. 누군가 발을 내딛는 간격에서 나오는 고의적인 마찰이었다. 소설의 감지망에서 이미 잡힌 이상 이쪽도 들킨 것은 분명했다. 이 길목에 이들을 배치해 둔 것은 일행의 하산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귀비의 손이 허리의 채찍으로 향했다. 남궁휘의 검 묶인 팔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러나 청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통 걸음으로 계속 내려가다가, 수풀에서 세 인영이 나타나는 순간 —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청운의 한 손이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손가락 끝에서 극음의 냉기가 실처럼 뻗어 나갔다. 소리도 없었고 살기도 없었다.
파파팟-!
세 명이 동시에 허공에서 굳어 버렸다. 어혈(瘀血)도 없고 부러진 뼈도 없었다.
당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각기 다른 도법(刀法)의 자세로 뛰어나왔다. 저마다 다른 신형(身形)과 다른 속도. 그 셋의 궤적을 동시에 읽어 가장 긴요한 혈도를 각각 봉해 버린 것이다. 생각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속도에서.
세 사람의 전신 혈도(穴道) 스물 네 곳 중 가장 긴요한 셋이 동시에 막혀, 의지와 무관하게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들의 전신 혈도(穴道) 스물 네 곳 중 가장 긴요한 셋이 동시에 막혀, 의지와 무관하게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이었다. 세 사람이 무릎부터 꺾이며 탁 쓰러졌다.
당귀비가 채찍을 거두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려가면서 심심하지는 않겠군."
남궁휘가 쓰러진 자들을 발로 뒤집으며 혈영회(血影會)의 낙인을 확인했다. 왼쪽 목덜미의 핏빛 그림자. 탐색조였다. 낙양 방면 모든 산길에 깔아 놓은 그물이었다. 탐색조 하나가 뚫리면 그 뒤에 후속 보고 체계가 있다. 이들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을 눈치채 기전에 낙양에 닿아야 했다.
청운이 쪼그리고 앉아 셋 중 가장 몸집이 큰 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남자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방금 전 자신들이 상대한 것이 무엇인지, 그 눈이 알고 있었다. 검도 채찍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였다. 그것이 더 두려웠다. 이 자들은 분명 일류 이상의 혈영회 살수다. 그럼에도 지금 세 명이 동시에 전투 불능 상태다. 저항도 없었다. 피도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뿐이었다.
"무림맹 접수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청운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분함이 더 무서웠다. 남자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혈도가 막혀 전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대뿐이었고, 청운의 눈빛 앞에서는 그것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그 눈동자는 냉기를 품고 있었으나 증오가 없었다. 사람을 부러뜨리는 것이 손짓 하나로 가능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깊은 공포였다.
"…… 반달이 못 된다."
남자가 쥐어짜듯 내뱉었다. 청운이 그를 놓아주었다. 세 사람은 혈도가 막힌 채로 땅에 쓰러져, 그들이 내려가는 뒷모습을 눈만 껌벅이며 바라보았다.
반달.
그 숫자가 일행의 발걸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반달 안에 낙양에 닿아 혈영회의 뿌리를 끊어내지 못하면, 무림맹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된다. 중원의 패권이 혈영회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다.
남궁휘가 쓰러진 탐색조 셋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핏빛 그림자 낙인, 혈영회의 표식. 낙양 외곽의 모든 산길에 이 자들이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무림맹 수뇌부에는 철면진인이 앉아 있다.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포위망 안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 묶인 팔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행이 산기슭을 벗어나 관도(官道)에 올라섰을 때, 흙길의 저 끝으로 넓고 탁한 낙양의 지평선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이른 봄 햇살이 잔설(殘雪)을 녹이며 진창을 만들어 놓은 길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낙양으로 향하는 모든 길은 같았다. 그 길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 — 상인, 행인, 순라군 — 그 어느 누구도 지금 이 네 사람이 무엇을 안고 걸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소설이 발걸음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낙양까지 사흘 안에 닿아야 합니다. 철면진인이 수뇌부에 완전히 자리를 굳히기 전에 안쪽 정보를 확보해야 합니다. 천기각 낙양 분소에 연락을 넣어 두겠습니다."
청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발을 내딛는 속도가 한 박자 빨라졌다. 아지랑이 속의 낙양을 향해, 멈추지 않고.
반달. 그 안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